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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산업진흥법위반 혐의를 파악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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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ooky 작성일24-04-26 03:00 조회9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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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사설바둑이현금 정신진보 제3권성층인간학제1장 정신과 인간학​7. 근사록(近思錄)에서 성층 인간학과 민주주의 정신​2015~2016년. 최인경(崔仁卿).​​이 책은 남송(South-Song)의 주희와 여조겸이 북송(North-Song)의 주염계=주돈이(濂溪 周敦頤), 정명도=정호(明道 程顥), 정이천=정이(伊川 程頤), 장횡거=장재(橫渠 張載)의 문장을 모아 1175년에 〈14장〉으로 편찬한 것이다. 주희(朱熹)의 서문과 여조겸(呂祖謙)의 서문을 참조하면, 이 책은 학문에 입문할 수 있는 책이고, 실제의 가까운 생활을 생각하는 책이다. 【근사록 Gun-Sa-Rok】(近思錄)의 글자 뜻은 “가까이 생각한 기록”이다. 주로 자기 시대에 행할 바를 썼으므로, 시대변화에 따라 사회제도가 달라진 것도 있는 것은 비판해야 하고, 시대에 변함없는 정신의 “진리길의 이치”(道理)와 자연법칙에 관한 것은 높이 존숭해야 한다. 우리 인간은 먼 우주도 가깝게 생각할 수 있다.​이 책은 강영(江永) 《근사록Gun-Sa-Rok을 “모아서 주석함”(集注집주)》, 섭채(葉采) 《근사록Gun-Sa-Rok을 “모아서 해석함”(集解집해)》등을 참조하여 한국어로 번역한 것이다. 이 책은 《동양 고전》에 해당한다. 이 책의 뒷부분에 《근사록Gun-Sa-Rok》(近思錄)의 한자 문장으로 된 원문이 있으므로, 그 번역을 알 수가 있다. 여기서는 도광순 님의 번역을 참조하여, 순 코리아어로 우리가 한자 원문에서 번역한 부분이 많다. 여기에서 우리가 21세기에 생각한 부분을 모으면, 《가까이 생각한 기록의 논의》(近思錄論근사록론)이라 부를 수 있다. 번호 뒤의 한 문단은 인용 글이고, 그 다음 문단은 우리의 생각이 있어서, 그렇게 반복된다. 우리는 다음의 번역 책을 사용했다. : 도광순 번역, 《근사록Gun-Sa-Rok 상~하》, 서문당, 서문문고 269~270번, 초판 1978, 2쇄 1984, 3쇄 1986.​​*****1. 진리길의 몸(道體)​1. 염계(Youm-Gei) 선생이 말하길, : 『“극이 없음”(무극)이면서 “커다란 극”(태극)이다. “커다란 극”(太極)이 움직여(動) 볕(陽양)을 낳는다(生). 움직임이 지극하면 고요함(靜정)이 되고 고요함은 그림자(陰음)를 낳는다. ... “다섯 다님”(오행)은 하나의 음양이고 음양은 곧 하나의 “커다란 극”(태극)이다. “커다란 극”(太極태극)은 본래 “극이 없음”(無極무극)이다. ... “극이 없음”(無極무극)의 참과 25의 자세함(精)이 깊게(妙묘) 합쳐져서 하늘-길(乾道건도)은 남자가 되고, 땅-길(坤道곤도)은 여자가 된다. 이 두 기운(氣)이 서로 교감(交感)하여 만물을 낳으니(生), 만물은 낳고 또 낳아서 변화가 끊임없다. 오직 사람은 가장 빼어난 기운을 얻어 가장 신령한 것이며, 형체는 이미 생겨났고 정신(spirit)은 피어나서 알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여기서 몸이란 온갖 만물의 물체를 포함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가 사는 자연계, 즉 물질로서의 〈우주론〉의 논의를 읽는다. 태양 같은 별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어떤 큰 극이 있어야 발생된다. 그런데 처음부터 큰 극이 있는 것이 아니고 “극이 없음”(無極무극)에서 시작하여 작은 물질들이 집합하면서 점점 더 큰 별의 극성이 만들어진다. 그러므로 그 물질세계의 과정은 “극이 없음”(無極무극)이면서 “커다란 극”(太極 macro-pole)이다. 이것은 태초부터 “커다란 극”(太極 macro-pole)이 있던 것은 아니라는 해석을 하게 된다. 그런데 물질들의 움직임(動)이 지극하여 이미 태양처럼 별이 만들어지고 태양계 내의 행성들이 궤도를 갖추게 되면, 그 후에는 질서 있는 고요함(靜정)이 된다. 대부분의 전통 학자들은 “커다란 극”(太極)이 태초부터 있는 원리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전통 철학의 “커다란 극”(太極)은 우주 전체로서의 극을 말한다고 해석된다. 그러므로 “커다란 극”(太極macro-pole)은 “극이 없음”(無極)이라고 말한 것이다. ​하늘에서 우주망원경으로 볼 수 있는 〈접시 모양의 나선형 성운들〉은 태양계 같은 별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포함한다고 우리는 말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은하계〉가 아니라 〈우리 은하 안〉에서 볼 수 있는 부분이 포함되어 있을 가능성이 있다. 멀리 있는 다른 은하계의 빛들은 너무 멀어서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없는데, 그 이유가 여러 암흑물질들과 성운들과 무수한 별들의 겹친 상태 때문이라고 우리는 말한바 있다. ㅡ 어떤 성운은 그 앞의 어떤 별빛에 반사하여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는 태양 같은 별들이나 태양보다 엄청나게 큰 별들도 잘 볼 수가 없다. 그런 상태의 별들이 수천 억 개가 모인 곳을 【은하】라고 정의하기 때문에, 멀리 있는 【다른 은하】를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은 증명이 필요 없는 자명한 이치의 진리다. 그런데 〈우리 은하계〉 바로 옆에 붙은 은하는 〈안드로메다 성운〉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많다. 그들은 그 〈안드로메다 은하〉를 사람의 눈으로 또는 광학사진으로 볼 수 있다고 말한다. 게다가 여러가지 나선형 성운의 중앙을 매우 밝게 두툼하게 그려서 그림으로 보여주기 때문에, 나는 그것의 일부는 【다른 은하】가 아니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리고 하늘에서 육안으로 보이는 【은하수】라고 칭하는 것의 일부는 태양계 내의 소혹성-대 와 카이퍼-대에 태양빛이 반사하여 지구에 도달한 것이 포함된 현상이다. 카이퍼대 근처나 밖에서 〈보이저 1~2호 같은 인공위성〉에서 은하수를 찍은 사진이 있으면 더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눈으로 볼 수 없는 검은 부분을 〈우주망원경〉으로 전파를 수집·측정하여 그림 사진으로 제작하면, 수많은 회전 은하계가 보인다고 한다. 2022년에 측정하기 시작한 〈제임스웹 우주망원경〉 이후에는, 그렇게 〈다른 은하계〉라고 부르는 것의 구성물질은 별들만이 아니라, 〔수많은 별들+다양한 성운·가스들〕로 되어있다고 새롭게 정의(definition) 될 것이다. 그러면 〈우리 은하계 안〉에서도 여러 종류의 성운=가스(?)가 함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은하 안〉에서도 회전하는 성운 모양이 있을 것이다. 〈제임스웹 우주망원경〉으로 찍힌 전파사진들은 비교적 가까운 별일수록 사방·팔방으로 퍼지는 길다란 선이 더 뚜렷하게 나타난다. 그러므로 거리를 복잡하게 계산할 필요도 없이, 관측자로부터 더 가까운 별의 거리를 직관으로 알 수 있다. 〈제임스웹 우주망원경〉은 여러 층으로 겹친 성운들의 멀고 가까운 차이까지 밝혀냈다. 만약 예전에 계산했던 별들의 거리에서 잘못 계산된 거리가 있었다면, 직관에 의하여 수정·정정할 수가 있고, 그 오류가 무엇때문인지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똑같은 별 또는 똑같은 은하가 여러 개로 보이거나 굴절 현상으로 보이면, 그 주변의 별·은하보다 더 멀리 있는 것이다. ​우리는 수년 전에 생각한 것이 있다. : 태양계의 행성들마다 〈인공위성〉을 보내서 태양계 행성들이 태양을 공전하는 거리에 따라서, 관측된 별자리가 변화하는 차이로써, 별들의 거리 계산이 잘못된 것을 고칠 수 있다. 태양계 공전의 직경 양끝의 거리가 멀수록, 관측된 별자리에서 변화된 차이가 있다면, 별들의 더 정확한 거리를 알 수 있다. 〈보이저 1~2호〉처럼, 태양계 외곽으로 인공위성을 보내면서, 계속 별자리를 찍은 사진을 보내온다면, 점점 더 먼 거리에서 그 차이를 관측할 수 있으므로, 더 정확한 〈별들의 거리〉를 알 수 있다. 여기서 【별자리】란 학교에서 다신론 신화의 이름과 함께 배우는 몇몇 별자리가 아니라, 천문학자들이 컴퓨터에 입력한 모든 별·은하들의 〈우주에서의 위치=장소〉이다.​천문학에서 다수설이면서 믿을 수 있는 것은 이렇다. : 마치 사람 뇌의 뉴런이 연결된 모습처럼, 우주의 물질들(matters)은 여러 방향으로 퍼져서 끌고 밀어내는 에너지들에 의하여 각 존재자들의 힘들이 연결되어 있다.​​***3. 이천 선생이 말하길 『“기쁨·화냄·슬픔·즐거움”(喜怒哀樂희노애락)이 아직 나타나지 않은 것을 가운데(中)라고 한다. 가운데(中)란 “고요히 그러함”(silently so-doing 寂然적연)하여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천하의 “큰 바탕”(大本)이라 한다.』​여기서 말하는 【가운데(中)】는 인간 정신(spirit)의 중앙이라고 해석된다. 정신(spirit)은 “고요히 그러하되”(silent so-doing 寂然적연), “스스로 그러함”(self so-doing 自然)이며, 큰 바탕이 되는 판단력이다. 그러나 움직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움직이는 가운데】이다. 정신(spirit)이 어떤 것에 종합적으로 판단할 때, 그것은 외부의 사실과 나의 감정을 모아서 중앙에서 움직이면서 판단하는 것이다. 판단은 【정신spirit의 운동력】이다. 정신(spirit)은 스스로 그러한 방향으로 움직이면서도, 모든 사실과 모든 감정의 가운데서 그 모든 것들을 판단하는 존재다. 정신(spirit)은 그 스스로가 판단의 기준이지만, 개인의 독단적인 기준이 아니라, 사람들 사이에 공통적인 주체에서 “공유주관”(common own view of subject)의 기준이다. ㅡ 이것은 사회적인 판단 정신이고, 국가와 사회의 중앙에 있다.​우리는 우주에서의 중심이 지구였다가, (중세 우주론), 태양으로 바뀌고, (근세 우주론), 태양도 어디론가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21세기). 이것은 우주에서 중심이 없다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태양계가 속한 은하계를 두툼한 접시모양으로 가르치면서, 중앙에 매우 밝고 넓게 큰 빛이 비추는 것으로 설명하는 것을 들었다. 이것은 사실이 증명된 것이 아니라, 그렇게 추측한 것을 전파시킨 것일 뿐이다. 게다가 그런 은하계가 엄청나게 많다고 가르치므로, 결국은 우주에 중심이 없다고 해석된다. 그러나 중앙을 알 수 없는 우주에서 관측자가 있다면, 그 관측자가 모든 것을 판단해야 하기 때문에, 판단 정신이 우주에서 중앙이라고 인정해야 한다. 즉, 우주 공간에서 지구가 중앙은 아니지만, 관측자인 인간이 지구에 있기 때문에, 관측한 곳이 중앙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지구에서만 관측하면 고대 시대 또는 중세 시대처럼 독단적인 우주론이 주장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인간들은 관측 장비를 태양계 가장자리까지 보내면서 여러 곳에서 관측했기 때문에, 지구가 중심이 아닌 것을 알면서도, 우주 여러 곳에서 공통적인 기준의 판단을 할 수가 있다. 즉, 우주에서 움직이면서 관측할 수 있는 인간(동적인 인간)이 우주의 중심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중앙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주장에 반대한 것이다.​“기쁨·화냄·슬픔·즐거움”(喜怒哀樂희노애락)은 사람의 감정의 표현이다. 이런 감정들은 우리가 어려서부터 많이 배웠으나, 그 구체적인 내용은 배우지 못하고 생각하지도 못했다. 그런데 감정은 【심리 단계의 감정】과 【정신spirit 단계의 숭고 감정】이 있다. 심리적 감정은 개인의 육체의 감응이나 오락적 계산규칙에 연결되어 높은 정신적 판단이 아직 없는 것이다. 여기서 기쁨과 슬픔이 반대말이고, 화냄과 즐거움(좋음)이 반대말이다. ​그러므로 두 사람 이상의 관계에서, 개인이 누구와 만나서 서로 사이가 좋으면 【기쁨】이고, 서로 사이가 나쁘거나 어느 쪽이 악(惡)을 당하면 【슬픔】이다. 또한 개개인의 행동에서, 자기 마음대로 자유로이 하면 【기쁨】또는 【즐거움】이고, 자기 마음 뜻대로 실천되지 않으면 【슬프거나】,【화를 낸다.】 그런데 화를 내는 대상이 타인일 때 사회관계(대인관계)의 문제가 발생한다. 그러므로 이 【화냄(분냄)】이 상대방이 용인할 정도이면 소란 없이 지나갈 수 있다. 그러나 상대방이 용인하지 않거나, 심지어 화내면서 상대방에게 악을 행하여 피해를 당하게 하면, 민사·형사의 사건으로 커진다. 그러므로 성경은 “화를 내어도 죄를 짓지는 말라”고 권한다. 게다가 화를 내지도 않으면서 악을 행하는 자까지 있다. 한마디로 “인간의 얼굴을 쓴 짐승의 마음”(人面獸心인면수심)이다. 프랑스 철학자가 “인간의 얼굴을 쓴 야만”이라고 말한 것은 이것을 뜻한다.​7. 『하늘이 부여한 것을 “목숨·명령”(命)이라 하고 물질이 “주어서 받은 것”(稟受품수)을 “본성·성질”(性)이라 한다.』​그러므로 우리는 “하늘의 목숨·명령”(天命)과 “물질의 성질”(物性)을 학문의 기본적 개념으로 알고 있다.​​8. 『“돌아간 정신”(鬼神)은 “만들어서 된 것”(造化조화)의 자취이다. 』​여기서 “만들어서 된 것”(造化조화)은 만들어진 만물, 피조물에 포함된다. 이것은 세가지 해석이 있다. ① 첫째, 만약 귀신을 허깨비ㅡ망상이라고 생각하면, 없는 것을 지어서 꾸며서 만들어낸 것이라고 말하는 경우다. ② 둘째, 만약 죽어서 몸이 사라진 것이 영향을 끼치는 정신이라고 생각하면, 과거에 사라진 물체나 생명체가 현재의 물체나 생명체에게 끼치는 영향력이므로, 자기 존재의 만들어진 기원과 조상을 생각하는 것이다. ③ 셋째, 전통 학자들은 죽은 학자들의 〈고전〉 책을 읽으면서, “돌아간 정신”(鬼神)이라고 생각했다. 고대 용어 신(神)은 인간의 정신spirit을 포함하는 용어라고 이미 설명했다. 또 한자어 사전에서 “鬼”(Gui)는 멀리 돌아간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11. 『어짊(仁, Yin=good love)은 천하의 드러남(公)이고 선함의 근본이다.』12. 『느낌(感)이 있으면 반드시 응함(應)이 있다. ... 』13. 『천하의 이치가 끝나자 다시 시작함은 항상(恒)하여 끝이 없기 때문이다. 항상(恒)은 일정불변한 것이 아니다. ... 오직 때에 따라서 “변하여 바뀜”(變易변역)이 곧 “항상 있는 진리길”(常道상도)이다.』​14. 『사람의 본성은 본래 선하다. ... 그 본성은 모두 선하지만, 그 재능은 아무리 해도 변화시킬 수 없는 “아래의 어리석음”(下愚하우)이 있다. 이른바 “아래의 어리석음”(下愚)은 둘이 있으니, “스스로 해침”(自暴)과 “스스로 버림”(自棄)이다. ... 』 //《정이천의 바뀜을 전함》(伊川易傳)》, “(가죽을 펴고) 고쳐 매달음”(革卦혁괘), “위에 6가지 함께함”(上六交)​15. 『사물에 있는 것을 이치(理)라 하고, 사물을 처리함을 올바름(義)이라 한다. 』16. 『어짊(仁, Yin=love)은 천하의 “바른 이치”(正理)이다. 』19. 『“중앙의 마음을 믿음, 진실한 마음을 믿음”(忠信)은 덕으로 나아가는 방법이니, 주권자는 항상 온종일 힘써 하늘의 길에 대응해야 한다. 대체로 하늘은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으니, 그 음양의 기운이 “변하여 바뀌는”(變易) 몸(體)을 바뀜(易)이라 하고, 그 변하여 바뀌는 이치를 진리길(道)라 하며, 그 작용을 신(神)이라 하고, 그 사람에게 명한 것을 본성(性)이라 하며, 본성에 따름을 진리길(道)라 하고, 그 진리길(道)를 닦음을 가르침(敎)이라 한다. 맹자는 안으로 들어가 또한 “커다랗게 그러한 기운”(greatly so-doing energy 浩然之氣)를 발휘했으니, 진리길(道)을 다했다고 할 수 있다.』 // 《정씨가 남긴 책》(程氏遺書) 제1 《두 선생의 말씀》(二先生語) 1. ​21. 『삶=낳음(生)을 본성(性)이라 한다. 본성은 곧 기운(氣), 기운은 곧 본성이니, 이것을 삶이라 이른다. 사람이 태어나서 “기운이 주어짐”(氣稟기품)이 있고, 이치(理)에는 선악이 있다. 그러나 본성 중에 선악 양자가 상대적으로 나타난 것은 아니다. 어려서부터 선한 자가 있고, 어려서부터 악한 자가 있다. 이것은 “기운이 주어짐”(氣稟)이 그렇게 하는 것이다. 선함은 본래부터 본성의 본질이다. 그러나 악도 또한 본성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 그 본성에 선악이 있으나, 본성이 선함은 물의 본바탕이 맑음과 같은 것으로서, 사람이 맑게 하는 노력을 통해 맑은 물과 같은 본성을 되찾아서, “하늘 이치”(天理천리)의 본연으로 돌아감이다. 그러므로 선악이 본성 속에서 둘이 상대적으로 각각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 《정씨가 남긴 책》(程氏遺書) 제1 《두 선생의 말씀》(二先生語) 1.​여기서 정명도=정호는 인간에 따라서 “본성이 선하다는 설”(性善說)과 “본성이 악하다는 설”(性惡說)을 모두 주장한다. 우리는 이미 “다수의 본성이 선하다는 설”(多數~性善說)과 “소수의 본성이 악하다는 설”(小數~性惡說)을 말했다. 그러나 생각하건대, 본래부터 악한 자가 어디 있겠는가? 악한 자는 정신(spirit)의 판단을 잘못하여 악을 선택한 것이다. 정신(spirit)이 무엇인지 모르고, 또한 정신(spirit)이 생각하는 내용도 모르기 때문에 악을 행하는 것이다. 정신(spirit)의 본성은 선(good)이다. ㅡ정약용.​또한 정명도=정호는 한 인간 안에서 선악 상대설을 반대한다. 그러므로 선악이 서로 투쟁하는 것이 아니고, 멀리 떨어진 원리를 주장한 칸트의 개념과 유사하다. 그리고 정명도=정호는 “본바탕이 맑음을 향해 돌아감(되찾음)”을 말하였다. 이것은 본성의 선악(善惡) 위에 있는 “본성이 선함을 향한다”(nature towards good 向性善)라는 것이라고 평가된다.​22. 『“하늘과 땅”(天地)이 만물을 낳는(生) 기상을 본다.』 // 《정씨가 남긴 책》(程氏遺書) 제6 《두 선생의 말씀》(二先生語) 2.​25. 『천지 만물의 이치는 홀로가 아니라, 반드시 상대·응대·응답(對)이 있다. 이것은 모두 저절로 그러한 것이지, 안배한 것이 아니다. 』 // 《정씨가 남긴 책》(程氏遺書) 제11.​주자학(주희의 학문)에서는 창조주 하느님과 그 하느님의 우주(天地) 초월성을 거의 말하지 않는다. 단순히 우주(天地)의 “극이 없음”(무극)과 “커다란 극”(태극macro-pole)의 물질적 구성 원리에 머문다. 주희가 모아놓은 문장인 《근사록》에서도 주로 물질적 우주 구성 원리와 인간 마음의 구조 및 자기 시대의 사회제도 등이 위주로 되어 있다. 그러므로 정약용은 주자학에서 “높은 하느님”(上帝상제) 개념이 죽은 것을 비판하면서, 공자의 원본으로 돌아가 인격적인 하느님을 믿게 되었다.​물론 “극이 없음”(무극)과 “커다란 극”(태극macro-pole)을 말한 우주론은 훌륭한 내용이다. 그러나 그것(물질론)의 기계적인 성질에만 머무는 것이 그 학문의 한계이다.​26. 『가운데(中)는 천하의 큰 바탕이니, 하늘과 땅 사이에 치우침이 없는 아래-위를 꿰뚫는 “바른 이치”(正理)이다.』 // 《정씨가 남긴 책》(程氏遺書) 제11. 《정명도 선생의 말씀》(明道先生語) 1.​〔정신spirit의 중앙〕에는 판단력이 있다. 이 판단 정신spirit의 “바른 이치”(正理)는 일종의 【이성의 법칙】에 해당하므로, 서양에서 말하는 【자연법】과 통하는 개념이다. 그런데 정명도와 정이천은 바로 여기에서 멈추고, 그 바른 이치가 창조주 하나님의 법칙이라고 말하지는 못한다. 두 정씨 형제가 말한 것에 “하늘의 명령”(天命)이 있으나, 그것은 주로 “바뀜의 경전”(易經역경)에서 말하는 우주(天地)에서 물질의 바뀌는 이치 또는 인간 마음mind이 바뀌는 이치에 머물러 있다.​27. 이천 선생이 말하길, : 『공(public 公)은 하나요, 사(private 私)는 만 갈래로 다르다. 사람 마음mind이 서로 다르기가 얼굴이 서로 다른 것처럼 됨은 다만 이 사심(private mind 私心) 때문이다.』 // 《정씨가 남긴 책》(程氏遺書) 제15 《정이천 선생의 말씀》(伊川先生語) 1.​35. 어짊(仁, Yin=love)에 관하여 물은즉 이천 선생이 답하길, : 『맹자는 말하길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은 어짊(love of goodness)의 싹이다」고 했다. 어짊(love of goodness)의 싹이라 한 것을 그대로 어짊(仁, Yin)이라 할 수가 없다. 한퇴지(韓退之)는 말하길 「널리 사랑함이 어짊(仁, Yin)이다」고 한 것은 잘못이다. 어짊(仁, Yin)이란 진실로 널리 사랑하는 것이다.』 ​애국심은 나라 안의 백성을 사랑함이다. 어짊(仁, Yin)은 진실로 널리 백성을 사랑함이다. 그러므로 애국심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어짊(仁, Yin)이 있어야 가능하다. 애국심은 이웃나라와 (특히, 같은 민족끼리) 다투거나 전쟁하는 것이 아니다. 어진(仁, Yin) 마음이 있으면 백성 사랑의 길이 무엇인지, 정의로운 나라가 무엇인지, 잘 알 수가 있다.​38. 『본성은 곧 이치다. 그 나온 근원을 살피면, 천하의 이치는 선함이 아닌 것이 없다. “기쁨·슬픔·슬픔·즐거움”(喜怒哀樂희노애락)이 아직 나타나지 않은 상태가 어찌 선하지 않겠는가? 그것(희노애락)이 나타나서 “마디와 법도”(節度절도)에 맞으면, 감정(情)이 움직이되 선하지 않음이 없다. 그러므로 무릇 선함에서는 모두 선함을 먼저 말하고 악함을 뒤로 말한다.』 // 《정씨가 남긴 책》(程氏遺書) 제22 《정이천 선생의 말씀》(伊川先生語) 8.​“기쁨·슬픔·슬픔·즐거움”(喜怒哀樂희노애락)이 “마디와 법도”(節度절도)에 맞는다는 판단은 누가 하는가? 그 판단은 높은 정신(spirit)이 스스로 깨달아서 하는 것이다. 불교에서 깨달은 후에 “큰 기쁨”(大喜), “큰 슬픔”(大哀) “큰 자비”(大慈), “큰 슬픔”(大悲) 등이 있지만, “큰 화냄”(大怒)은 없다. 그러나 고대 시대 유대교에서 “하나님의 화냄”(神之忿怒) 개념은 있었으며, 그 후에 기독교에서 “하나님의 심판”(神之審判) 개념이 21세기까지 이어진다.​39. 어떤 사람이 묻길 『마음(mind)에 선악이 있습니까?』 대답하길 『하늘에서 “목숨=명령”(命)이 되고, 물질에서 이치가 되고, 사람에서 본성이 되고, 몸에 “주권자”(主宰주재)가 되면 마음(mind 心)이 되는데, 실제로는 하나다. 마음(mind)은 본래부터 선하지만 생각하여 나타나면 선(good)도 있고 악(evil)도 있다. 만약 이미 나타나면, 이것을 “정서적 감정”(emotional feeling 情)이라 하고 마음(mind 心)이라 하지 않는다.』 // 《정씨가 남긴 책》(程氏遺書) 제11 《정이천 선생의 말씀》(伊川先生語) 4.​여기서 물리=〔물질에서 이치〕, 생리=〔몸의 주재·자율〕, 심리=〔생각하여 나타난 심정〕, 정신(spirit)=〔사람의 높은 본성〕의 단계를 생각할 수가 있다. 실제로는 모두 합쳐져서 한 인간 속에 있다. 그런데 정이천은 “마음mind이 생각하여 나타나는 감정은 선악이 있다”고 말하였다. 여기서 마음(mind)=정신(spirit)+심리(psychology)로 해석할 수 있다. 정이천이 말하는 情(emotional affection)은 심리적 감정(psychological emotional feeling)이다. ​선악 ㅡ 이것은 심리 단계의 “기쁨·슬픔·슬픔·즐거움”(喜怒哀樂희노애락)의 감정(感情)을 정신(spirit)의 단계에서 판단하는 선악이다. 그러므로 심리 단계에서 표현되는 “기쁨·슬픔·슬픔·즐거움”(喜怒哀樂희노애락)은 정신(spirit) 단계에서 선악의 판단을 받는다. 개인들 사이의 관계에서 심리적 즐거움과 기쁨은 국가·사회의 공동체에서 여러 개인들의 공통성·공동선과 사회 규칙에서 판단을 받는다. 한 개인의 즐거움이 다른 사람의 기본권을 해친 것이면, 악함으로 판단된다. 그러므로 마음이 표현되고 행동되어 사람들 사이에 관계에서 기본권을 침해한 것으로 나타난 사설바둑이현금 것이면, 선악이 있다고 판단된다.​40. 『본성은 하늘에서 나오고, 재능은 기운에서 나온다.』 // 《정씨가 남긴 책》(程氏遺書) 제19 《정이천 선생의 말씀》(伊川先生語) 5.​하늘(天)을 우주 물질로 생각하면, 인간의 본성이 물질에서 나왔다고 하므로, 유물론자가 될 가능성이 있다. 하늘(天)을 우주 물질을 다스리는 창조주 하나님으로 생각하면, 인간의 본성이 하나님의 형상(form)을 따라 나타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41. 『본성은 자연히 완전하게 구비되어 있다. 믿음(信)은 다만 그것(본성)을 가진 것이다. 그러므로 “네가지 끝”(四端)에서 믿음(信)을 말하지 않는다.』 // 《정씨가 남긴 책》(程氏遺書) 제9 《정이천 선생의 말씀》(伊川先生語) 9.​43. 횡거(橫渠) 선생이 말하길 『기운은 “커다란 빔”(太虛 Maco-void)에 가득 차 있어서, 흐르고 내리며 좌우로 유동함이 일찍이 잠시도 머물거나 그친 적이 없다. 이 기운은 “비어 있고”(void 虛) “차 있으며”(fill·fruit 實) 움직이고(動) 고요한(靜) 기틀이며 음양(yin-yang)·굳셈(剛)·부드러움(柔)의 시초이다. 』 // 《바르게 입힘》(正蒙정몽) 〈커다란 화합〉(太和)​46. 『“돌아간 정신spirit”(鬼神)은 두 기운의 “좋은 능력”(良能)이다.』 // 《바르게 입힘》(正蒙정몽) 〈커다란 화합〉(太和) 〈움직이는 물질〉(動物)​여기서 “돌아간 정신spirit”(鬼神)은 먼 정신(spirit) 또는 죽은 사람의 정신spirit이다. 허깨비가 아니다. 그러므로 죽은 사람의 기운과 나의 산 기운이 만나 훌륭한 능력이 되는 것을 뜻한다. 위대한 죽은 사람의 정신(spirit)의 기운은 〈고전〉 책 속에 글자로 적혀 있다. 살아 있는 내가 그것을 이해하며 자기 시대에 고칠 바를 생각하면, 훌륭한 능력이라 할 수 있다. 죽은 사람 중에서 악했던 자들은 심판받을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성경〉에 기록되길, “악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선한 자는 영생의 부활로 나타난다.”​47. 『... 기운이 응집함을 신(神)이라 하니, 그것은 펼침(伸)의 뜻이고, 기운이 되돌아가 흩어짐을 “먼 곳”(鬼)라 하니 이것은 “돌아간다”(歸)는 뜻이다.』​이것은 학계에서는 장횡거=장재의 【기일원론(氣一元論)】이라 칭한다. 우리는 고대 용어 신(神)은 인간의 정신을 포함하는 뜻이라고 이미 설명했다. 여기서는 장재=장횡거가 신(神)의 용어에서 “신의 기운”(神氣), 또는 “정신spirit​의 기운”(精神氣)으로 사용함을 알 수 있다. ​48. 『본성은 만물의 한 근원이니, 나만 얻어서 사사로운 것이 아니다. 다만 “위대한 사람”(大人)만이 그 진리길(道)을 다할 수 있다. 그러므로 자립을 하면 반드시 남과 함께 자립하고, 알면 반드시 두루 알며, 사랑하면 반드시 고루 다 사랑하며, 이루면 홀로 이루지 아니한다.』 // 《바르게 입힘》(正蒙정몽) 〈진실한 밝음, 정성스런 밝음〉(誠明)​​*****2. 학문을 하는 큰 요약, 학문의 큰 줄거리(爲學大要)​1. 염계 선생이 말하길 : 『“거룩한 사람”(聖人saint human)은 하늘(天)을 “바라고 구하며”(希求), “현명한 사람”(賢人)은 거룩한 사람을 바라고 구하며, 선비(학문하는 사람)는 현명한 사람을 바라고 구한다.』​2. ... 이천 선생이 답하길, 『학문은 거룩한 사람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이다. 』... 『천지(天地)는 “자세하고 순수함”(精粹정수)를 묶어 모아서 만물을 생성하고, 오행(五行)의 빼어난 기운을 받은 것이 사람이 된다. 그 본체는 “순수하고 참되어”(純眞순진) 고요하다. 이것이 아직 나타나지 않으면 “다섯 성질”(五性)을 그 속에 갖추어 있다. 말하자면 어짊(仁“love of good”)·올바름(義)·예의(禮)·지혜(智슬기)·믿음(信)이 그것이다. 情(emotional affection)이 격심해져서 더욱 방탕해지면, 그 본성이 훼손된다. 그러므로 깨달은 자는 그 情(emotion affection)을 단속하여 중앙에 합치시키며, 그 “마음을 바르게”(正心) 하고, 그 “본성을 기른다”(養性). ... 그러므로 학문의 방법은 먼저 본성을 마음 속에 밝혀 나아갈 바를 알고, 그 후에 “힘써 행하여”(力行) 거룩한 사람에 도달함을 구해야 한다. 이것이 이른바 밝음(明)으로 인하여 “진실하게, 정성스럽게”(誠) 되는 것이다. ... 그러나 거룩한 사람은 생각하지 않고도 터득하며 힘쓰지 않고도 진리길(道)에 맞는다. ... 거룩한 사람은 본래 낳을 때부터 아는 자이므로 배워서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이천문집》 제4. 「안자An-za가 어떤 배움을 좋아하는 것인지 논의함」(顔子所好何學論)​여기서 정이천=정이가 “생각하지 않고도 터득하며 힘쓰지 않고도 진리길(道)에 맞는다” 또는 “본래 낳을 때부터 아는 자이므로 배워서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 것은 크게 잘못 된 것이다. “거룩한 사람, 위대한 사람”(聖人)은 많은 생각을 했기 때문에, 정신적 노력에 힘썼기 때문에, 그 경지에 도달한 것이다. 낳을 때부터 아는 자는 아무도 없으며, 배우지 않고 아는 자는 또한 아무도 없다. 알기 위해서 노력하고 배우기에 힘썼기 때문에, 결국 올바른 생각의 경지에 도달한 사람이 성인(saint human 聖人)이다.​7. 『君子(Gun-Ja)=주권자(Sovereign)는 “정중함, 공경함”(敬)을 주로 하여 그 안을 바르게 하며, 옳음을 지킴으로써 그 밖에 “방향을 바르게 한다”(方正).』 // 《이천역전》건괘 문언전.​경(敬Gyoung)은 句(글귀, 어귀) 글자 위에 ⺿(초두), 그 옆에 ⺙(둥글월문 방)이 있다. 그것은 “문장의 구절”(文句)를 다듬어서 뜻을 바르게 한다는 것이다. 문장은 생각을 나타낸 것이다. 그러므로 문구의 뜻이 바르게 되려면, 생각의 가운데가 바르게 되어야 한다. 여기서 경(敬Gyoung)의 사전 글자 뜻에 “바른 가운데”(正中)가 포함되었다. 경(敬Gyoung)은 안의 정신을 바르게 함으로써 밖으로 표현되는 말과 행동이 바르게 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동아시아 3국의 전통 철학에서 “정중함, 공경함”(敬)은 중요한 개념이 되었다. 내가 어릴 때 20세기 말에 학교에서는 경(敬Gyoung)의 글자만 가르치고 뜻을 풀어서 가르치지 못했다. 그러므로 이제 21세기 초에 우리가 (육체적으로 힘든 상태에서도) 스스로 해석하게 된 것이다.​16. 명도 선생이 말하길 : 『“말의 논술”(言辭)을 닦아서 “진실·정성·성실”(誠)을 확립한다는 말을 자세히 깨달아 이해해야 한다. “말의 논술”(言辭)을 삼감은 곧 “진실·정성·성실”(誠)을 확립하고자 하는 것이다. 만약 단지 언사를 수식하는 데에 마음을 쓴다면, 이것은 다만 거짓이다. 만약 “말의 논술”(言辭) 닦기를 바로 자기의 “진정한 의지”=“정성스런 뜻”(誠意)을 확립하려 한다면, “정중·공경”(敬)으로 마음을 바르게 하고, 올바름(義)으로 행동에 “방향을 바르게 하는”(方正) “열매있는 실제의 일”(實事)을 체험할 것이다.』 // 《정씨가 남긴 책》 제2. 「두 선생의 말씀」1.​17. 이천 선생이 말하길, : 『진리길(道)의 지향이 간절함은 진실로 “진정한 의지, 정성스런 뜻”(誠意)이다. 만약 급히 서둘러 이치에 맞지 않으면, 도리어 진정하지(誠) 않게 된다. 대체로 “실재의 이치”(實理) 속에 스스로 “느리고 빠름”(緩急)이 있으니, “다그쳐 끊음”(迫切박절)을 용납하면 안 된다.』 // 《정씨가 남긴 책》 제2. 「두 선생의 말씀」2.​19. 명도 선생이 말하길, 『외적인 일을 생략하라. 다만 선함을 밝히고 오직 “진정한 마음, 정성스런 마음”(誠心)을 발전시켜라. 그 문장은 비록 맞지 않아도 진리길(道)에서 멀지 않을 것이다.』 // 《정씨가 남긴 책》 제2. 「두 선생의 말씀」상.​25. 명도 선생이 말하길, 『순(舜) 임금이 밭 가운데서 기용된 것으로부터 백리해(百里奚)가 저자(저잣거리)에서 등요된 것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랬던 것처럼, 성취함이 있길 바란다면, 반드시 이 진리길(道)를 걸어가야 한다.』 // 《정씨가 남긴 책》 제3. 「이천 선생의 말씀」 3.​오늘날엔 이런 경우가 거의 없다. 거의가 아니라 하나도 없다. 공연히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요행수나 바라게 해서는 전혀 소용이 없다. 정치가와 관계 없이, 자유의 마음에서 스스로의 도덕적 인격을 성장시키고 정신을 진보시켜야 할 것이다. 유학자들의 병폐는 자기가 마음-공부하면 누가, 특히 정치가가 언젠가 자기를 사용해 줄것이라고 헛된 망상을 하는 것이다. 오늘날엔 그런 생각은 거의 미신과도 같다. 21세기 초의 역사는 흑암의 시대라서 아무도 스스로 공부하는 자를 존중하지 않는다. 정치가들은 대체로 탐관오리의 직책만 가지고 있다. ​​27. 명도 선생은 “기록하여 암송함”(記誦기송)과 “넓은 지식”(博識박식)을 “물건을 갖고 놀다가 죽는다는 뜻”(玩物喪志완물상지)으로 보았다. // 《정씨가 남긴 책》 제3. 「두 선생의 말씀」3.​외우는 것보다는 내용을 이해하는 것이 더 높은 정신이다. (칸트). 정명도=정호가 말하는 “넓은 지식”(博識박식)은 잡다하고 자질구레한 여러 가지를 모두 모아 두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기준도 없이 많이 모아만 두는 것은 자기가 본래 말하려는 의도에서 벗어난 여러 가지 나쁜 사실관계도 있으며, 논의할 중요한 요점에서 벗어난 것들도 있다. 그런 정보들은 도서관의 모든 책들이나, 컴퓨터 또는 인터넷에 엄청나게 많이 있다.​그러나 박사학위 과정은 논의의 개념적 주제와 연결된 많은 넓은 지식이 있을 수 있다. 그러므로 박사과정은 논의의 개념에서 벗어나면 안 되며, 그 핵심 주제 안에서 논의될 수 있는 넓은 연관 개념과 사실들이다. 그러므로 논의의 중심점에서 여러 넓은 지식들이 비교되고 판단되어야 한다. 대체로 내용을 모르면 판단할 수가 없으며, 자기 시대를 모르면 자기 시대에 행할 바를 새롭게 말하지 못한다.​박사 과정이 아니어도, 여러 학문은 정신​spirit​의 중앙에서 판단력이 중요하다. 특히, 선악 판단력은 윤리·도덕적 판단이다. 선악·“참과 거짓”(眞僞)·“바름과 어그러짐”(正邪)·“정직과 간사히 속임”(正邪)·“이것과 아님”(是非) 등의 판단력이 함께 있어야 한다.​31. 『학문에서는 이치를 밝혀야 하고, 정치에서는 반드시 그 “뿌리의 바탕”(根本)을 알아야 한다.』 // 《정씨가 남긴 책》 제3. 「두 선생의 말씀」3.​33. 『“뿌리의 바탕”(根本)을 반드시 먼저 배양해야 한다. 그 후에 방향을 확립할 수 있으며, 방향이 올바르면 진리(道)에 이르는 정도는 힘씀과 힘쓰지 않음에 달여 있다.』 // 《정씨가 남긴 책》 제6. 「두 선생의 말씀」6.​36. 『학문하지 않으면, 곧 늙고 쇠퇴한다.』37. 『사람이 학문에서 진보하지 못함은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 // 《정씨가 남긴 책》 제14. 「명도 선생의 말씀」4.​42. 『보고 듣고 생각하고 행동함이 모두 “하늘의 이치”(天理)이다. 사람은 다만 그 중에서 참·거짓을 식별해야 한다.』 // 《정씨가 남긴 책》 제14. 「명도 선생의 말씀」4.​​*****3. 물질을 연구하여 이치를 다함 물질을 바로잡아 이치에 도달함 (格物窮理) ​8. “진실한 마음의 믿음, 중앙의 마음의 믿음”(忠信)으로 덕에 나아감을 물었더니, 대답했다. : 『진실로 힘써 행하되, 앎에 이르기는 매우 어렵다.』 이천 선생이 말했다, : 『학문하는 사람은 마땅히 힘써 행해야 한다. 그러나 모름지기 완전히 알고 난 후에야 올바른 행위(行)을 얻을 수 있다. ... 아직 앎에 이르지 못하고 “정성스런 의지, 진실한 뜻”(誠意)를 바라다면, 그것은 순서를 어긴 것이니, 힘써 행함이 어찌 오래 지속될 수 있겠는가? 다만 이치를 비춤을 밝게 한다면 자연히 이치에 따르기를 즐거워하니, 본성은 본래 선함이고 이에 따라 행한다. 이치에 따름은 본래 어려운 것이 아니다. 앎에는 많고 적음의 차이가 있고, 깊고 낮음의 차이가 있으니, 학문하는 자는 모름지기 이것을 참으로 알아야 한다.』 //《정씨가 남긴 책》 제18. 「두 선생의 말씀」4.​삼민주의(三民主義)를 주장한 손문도 또한 “앎은 어렵고 행함은 쉽다”(知難行易지난행이)라고 선언한바 있다. 손문은 정치가이기 때문에, 무엇을 행할지 아는 것이 어렵고, 일단 알고 난 후에는 정치적으로 행하는 것이 쉽다고 말한 것이다. 그러나 코리아 남북은 무엇이 역사에서 중요한지 알지도 못할 뿐 아니라, 선각자들이 어렵게 연구하여 알려주어도, 정치가들의 수준이 매우 낮아서 실천하지 않고 있다. 그래서 흑암의 시대라는 것이다.​10. 『생각함을 “깊이-밝음”(睿)이라 한다. 생각을 오래한 후에 “깊이-밝은 지혜”(叡智)가 자연히 생긴다. 만일 한 가지 일에서 생각하여, 이치를 얻지 못하면, 잠시 다른 한 가지 일을 바꾸어 생각하라.』 //《정씨가 남긴 책》 제18. 「두 선생의 말씀」4.​13. 『생각함을 “깊이 밝음”(睿)이라 한다. “깊이 밝음”(睿)은 거룩함을 만든다. “생각에 도달함”(致思)는 우물을 파는 것과 같으니, 처음엔 흐린 물이 나오지만, 오랜 뒤엔 차츰 맑은 물이 솟아 나온다.』 // 《정씨가 남긴 책》 제18. 「두 선생의 말씀」4.​14. 『어떻게 함을 “가까이 생각함”(近思근사)이라 하는가? 』이천이 대답하길, 『가까이 유사한 것으로 미루어 생각하는 것이다.』 // 《정씨가 남긴 책》 제18. 「두 선생의 말씀」4.​15. 『학문하는 자는 먼저 의심나는 것을 모아서 얻어야 한다. 』 // 《정씨의 바깥 책》 제11.​자기 사회와 자기 국가의 문제가 무엇인지 모르는 자는 학문이나 정치를 할 수가 없다. 먼저 해결할 문제가 무엇인지 알고 난 후에야, 그 문제의 해결책을 생각할 수가 있다. 21세기 초에는 해결책을 알려 주어도 정치가들이 실천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18. 『“올바른 이치”(義理)의 학문은 반드시 이치에 깊이 잠겨서 비로소 이루어지는 것이다. 얕고 가볍게 해서는 얻을 수가 없는 것이다.』 // 《장자(장횡거) 전서》제6. 《경학의 이치를 파다》(經學理掘) “올바른 이치”(義理).​19. 『학문을 연구하여 “일의 이치”(事理)를 추구할 수 없는 것은 다만 마음이 “자세하고 세밀”(精細)하지 않기 때문이다.』​20. 『글에서 넓은 학문을 하는 것은 단지 “곤란을 통해서 마음이 형통하게 된다”는 뜻을 얻어야 한다. 대개 사람들은 어려움을 격은 뒤라야 그 마음이 이치에 통한다.』​여기서 말하는 “곤란”, “어려움” 등은 경제적 생활의 어려움이 아니라, 학문적 이해(앎)의 어려움을 뜻한다. 어떤 학문의 내용을 이해하려고 하면 반드시 알기 어려운 점에 도달하고, 그것이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을 경험한 후에야, 비로소 새로운 단계의 상승된 이해력에 도달한다. 게다가 “넓은 학문”(博學)은 전문적 좁은 학문 사이의 소통이 어려우며, 스스로의 앎의 경계를 넓혀감으로써 비로소 그 뜻의 소통이 이루어진다. 그러나 일단 알고 난 후에는 너무나 쉬운 것이 또한 자명한 진리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해하기까지는 어려운 점이 있으나,) 이해한 후에 볼 수 있는 쉬운 과정을 강조한 것이다.​21. 『“올바른 이치”(義理)에 의문이 있거든, 묵은 견해를 씻어 없애고, 새로운 뜻을 가져오도록 할 것이다. 마음 속에서 트이는 바가 있으면, 곧 기록한다. 생각하지 않으면 도로 막힌다. 모름지기 다시금 밝은 벗의 도움을 얻을 것이다. 하루라도 벗들과 의논이 있으면, 하루 사이에 “의미를 생각함”(意思)에 달라짐이 있을 것이다. 반드시 나날이 강론할 것이다. 이렇게 오래 지속하면, 진보를 “스스로 깨달을”(自覺) 것이다.』 // 《장자=장횡거=장재 전서》제7., 《경학의 이치를 파다》(經學理掘 경학이굴) 「학대원」下.​22. 『무릇 “앎에 도달”(致知)하다가 설명할 수 없는 곳에 이르러, 다시 “살펴서 생각하여”(審思심사) “밝게 변론”(明辯명변)하면 이것은 올바른 학문이 되는 것이다.』 // 《장자(장횡거) 전서》제14. , 《근사록 습유》.​23. 이천 선생이 말하길, : 『무릇 문자를 보는 것에서는 먼저 반드시 그 “글자의 올바른 의미”(文義)를 밝혀야 한다(曉). 그런 후에 그 글의 의지(뜻)를 구할 수 있다. 아직 문자의 올바른 의미를 밝히지 않았는데, 뜻을 알 수는 없는 것이다.』 // 《정씨가 남긴 책》제22 「정이천 선생의 말씀」8.​24. 『학문하는 사람은 “스스로 얻음”(自得)이 있어야 한다. “여섯 경전”(六經)은 광대한 것이므로, 당장 그 뜻을 다 밝혀 알기 어렵다. 먼저 그 순서-방법을 안 뒤에, 각각 그 대강의 내용을 알아서 그 이상의 것은 각자 “스스로 얻음”(自得)이 중요하다.』 // 《정씨가 남긴 책》제22 「이천 선생의 말씀」8.​25. 무릇 문자 이해에서는 다만 그 마음을 쉽게 하면 스스로 이치가 된다. 이는 다만 옳은(是) 사람의 이치이므로, 매우 분명하여, 한 줄기의 평탄한 낮은 도로와 같다. ... 혹은 말하길, : 『성인의 말은 두려워서(恐) 얕고 가까움을 본 것이라고 할 수 없다.』 말하길, : 『성인의 말은 스스로 “가까운 곳에 있고”(近處) 또 “깊고 먼 곳에도 있으니”(深遠處) ... 양자가 말하길 “성인의 말은 멀어서 하늘과 같고 현인의 말은 가까워서 땅과 같다”고 하였는데, 정이(頤)는 이것을 고쳐 말하되, “성인의 말은 그 멀기가 하늘과 같고, 그 가깝기가 땅과 같다”고 하였다.』 // 《정씨가 남긴 책》제18 「이천 선생의 말씀」4.​27. 『무릇 책 볼 때는 서로 표현이 비슷하다고, 그런 뜻으로 한정하면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글자와 그 뜻이 서로 막혀버리므로, 마땅히 그 “문맥의, 문장의 기세”(文勢) 아래 위의 뜻을 관찰해야 한다. (마음이 가득) “차서 익은 것을”(充實충실) 아름답다고 일컫는 것과 같이, 시의 아름다움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 // 《정씨가 남긴 책》제18 「정이천 선생의 말씀」.​29. 『공자가 시냇물 위에서 말하길, “가는 것은 이러한 사내와 같다”(逝者如斯夫서자여사부)라고 하였으니, “진리의 몸”(道之體)이 그와 같음을 말한 것이다. ... “내부에서 모름지기 올바른 스스로의 견해를 얻는다.”(裏須是自見得이수시자견득). 장역(張驛)이 말하길 “이것은 편함은 올바름이 끝없다는 것이다.”(此便是無窮). 선생이 말하길, “오로지 이것은 진리길이 무궁함이다.”(固是道無窮). ” ... “편하다. 진리길은 얻어서 마쳤도다.”(便道了得也편도료득야). “편안한 길은 얻어서 마쳤다.”』 // 《정씨가 남긴 책》제18 「정이천 선생의 말씀」.​여기서 편하다는 것은 마음이 편안해졌다는 것이다. 여기서 시냇물 위에서 있다는 것은 마치 진리의 배를 타고 연구하면서 시냇물 위를 가는 것과 같다고 해석된다. 그러므로 진리의 시냇물이 가듯이 자연스럽게 그 진리의 물길로 사내의 몸이 같이 흘러가는 것으로 해석된다. 진리의 길에서 인간이 생각하는 것은 무궁하다. 그러나 목표까지 편한 길은 마칠 수 있다. ​정이천이 〔진리의 내용이 가는 것은 “진리길의 몸”(道之體)이다〕라고 해석한 것은 《바뀜의 경전》(易經역경)의 영향이라고 평가된다. 바뀜(易)은 물질세계의 규칙적인 변함(變)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정이천은 우주물질이 바뀌는 길은 무궁하다고 해석한 것이고, 그것이 편하고 옳다고 생각한 것이다. 정이천이 말하는 “진리길의 몸”(道體)는 곧 “진리의 기운”(道氣)이라고 평가된다.​그러므로 도광순 님이 이 문구의 번역에서 “도의(理)”라고 의역한 것을 다시 한 번 생각할 필요가 있다. 생각하건대, : “진리길의 이치”(道理)는 불변의 이치이다. 그러나 “진리길의 기운”(道氣)은 언제나 흐르고 변하는 것이다. ㅡ 정이천으로부터 500년 후에 나타난 서경덕의 〈기운 불멸론〉은 이것을 설명한 것이라고 평가된다. “진리의 이치”(道理)는 올바른 판단력이 함께 한 높은 정신적 가치이다. 이를테면 살인·뇌물·횡령·사기·폭력 등등은 시대가 아무리 바뀌어도 범죄행위이고, 그것은 道(Tao)가 아니다. 처벌하지 못하는 경우는 〈정부의 무능력한 역사의 시대〉라고 평가된다. 그러나 “진리길의 기운”(道氣)은 내가 생각하지 않아도 물질세계와 인간의 사회세계에서 언제나 변하는 형상·현상의 기운이다. 이를테면 물질의 모양이 시간에 따라서 바뀌는 것처럼, 정치의 형식적 제도는 바뀌어서, 옛날엔 왕권 계급의 정치사회였는데, 21세기엔 민주 주권자 정치사회이다. 이 경우도 형식적인 투표제도와 정치제도가 바뀌어가고 있다. 다만 그 과정이 투명하게 바뀌어야 할 역사적 과제가 있다.​이렇게 우리는 진리의 실체를 논할 때, “진리의 기운”(道氣), 즉 “진리의 몸”(道體)과 “진리의 이치”(道理)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특히 “진리의 기운”(道氣)은 여러 동양 철학자들이 말한 “진리의 그릇”(道器)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30. 『지금의 사람들은 글을 읽어 모으지 못한다.(今人不會讀書). 시 300편을 주어 암송하는 것처럼 이로써 정치 밑에서 도달하라.(如誦詩三百授之以政下達). 사방으로부터 오로지 대답하지 못하게 하면,(使於四方不能專對), 많다 하더라도 또한 어찌 이것을 하랴?(雖多亦奚以爲)? 모름지기 그렇게 아직 시를 읽을 때가 아니며,(須是未讀詩時), 정치에 도달한 것이 아니고, 오로지 대답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윽고 시를 읽은 후에는, 정치에 도달함이 편하다.(便達於政). 오로지 사방에 대답할 수 있어야 옳게 시를 읽기 시작한 것이다.(能專對四方始是讀詩).』 // 《정씨가 남긴 책》제19 「이천 선생의 말씀」5.​33. 돈(焞)이 처음 와서 학문하는 방향을 물으니, 선생이 대답하길, : 『학문함이 “공식적으로 필요하면”(公要), 모름지기 책을 읽어야 한다. 책은 반드시 많이 보지 말고, 그 요점을 알 필요가 있다. 많이 보고 그 요점을 모르면, 책방의 귀이다. 이(頤)는 푸르고 작았을 때 책을 읽으면 많이 읽기를 탐했는데, 지금처럼 그것을 많이 잊었다. 모름지기 그렇게 장차(將) 성인의 말을 “익숙히 맛보아야 하고”(玩味), “마음에 들어가 드러내 기록한 연후 힘써 행하여 간다는 것은”(入心記著然後力去行之) 스스로 얻는 바가 있다. 』 // “옛 주해”(舊註) 《정씨가 남긴 사설바둑이현금 글》.​내가 이 고전을 다시 원문으로부터 정확하게 번역해보는 이유는, 시간이 많아서가 아니라, 그 생각한 정확한 과정의 내용을 알기 위한 때문이다. 그 후에야 그 내용을 평가하면서, 오늘날의 역사에서 행할 바를 새롭게 생각할 수가 있다.​39. 『학문하는 자는 당연히(當) 《논어》《맹자》가 뿌리이다. 《논어》《맹자》를 이미 다스리면, “곧 여섯 경전이 가히 다스려지고 밝아지지 않겠는가?”(則六經可不治而明矣)? 독서하는 자는 마땅히 성인(聖人)이 경전을 지은 뜻을 살펴본다. 성인이 주어 마음을 사용한 바, 성인이 주어 성인에 이르는 바, 그리고 내가 아직 그것에 이르지 못한 바, 또 아직 내가 얻지 못하는 바이다. 구절구절에서 이것을 구하고, 낮에 읊어 그것을 맛보고(味), 밤중에 이것을 생각하여, “그 마음을 평등케 하며”(平其心), 그 기운을 쉽게 하고(易其氣), “그 의문의 큰 문은”(闕其疑) 곧 성인의 뜻을 보는 것이리라!(則聖人之意見矣)! 』 // 《정씨가 남긴 책》제25 「이천 선생의 말씀」11.​세계의 고전은 학문의 출발이자 마지막이다. 그러므로 유학에서 사서오경(四書五經)은 물론, 세계종교들의 경전들, 철학의 고전들, 각 전문 분야의 고전들은 우리 연구의 대상이면서, 또 그것을 이해하여 평가하면서 넘어서는 것 ㅡ 그것은 우리 시대 【역사의 진보】와 【정신의 진보】를 뜻한다.​“앎과 행함이 하나에 이르는 것”(知行一致)는 인간이 생각하는 노력에 따라서 국가와 사회에서 역사가 진보되는 것을 뜻한다. 세계의 고전에서는 자기의 정신 단계에 맞는 구절들이 여러 곳에 흩어져 있다. ① 첫째, 초등학교와 중학교에서는 공부는 왜 하는가 하는 이유와 각 분야의 가장 기초적인 지식을 가르친다. 물론 초등학교보다는 중학교에서 더 자세한 내용이 있다. ② 둘째, 고등학교와 대학교에서는 공부하는 방법과 내용에서 그 요점과 의문점을 가르친다. 요점은 가르치는 대상 인물의 저서에서 인용하여 출처를 밝혀야만 한다. 그 출처의 분량이 많아지면, 점점 더 좋은 내용의 공식적 학문으로 자리 잡아 가는 것이다. 특히 대학교부터는 스스로 해결하는 과제와 그 과정을 가르쳐야 한다. 그래서 대학교에서 스스로 공부한 내용인 《리포트(보고서)》와 그 인용된 출처가 중요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③ 셋째, 대학교 졸업 이후의 성인들이 스스로 자기 정신을 공부하는 내용이 자유 정신으로서 중요한 것이다. 여기서는 전문가의 학술과 기술의 연구일 수도 있고, 일반인 스스로의 정신적 진보일 수도 있다. 자기가 공부한 내용과 그것에서 연결된 자기 사회의 문제를 “자유 정신”(liberty spirit)으로 생각해보는 것은 곧 역사가 한 단계 진보하는 과정이다.​42. 묻길, “또한 장차《논어》《맹자》의 요긴한 곳만 보면 어떻습니까?”(問且將語孟緊要處看如何)? 이천이 대답하길, 『오로지 이것이 좋다(固是好). 그러하여 얻는 것이 있어도, 끝내 두루 다스리지는 못한다(終不浹治). 대개 나의 길(道)은 석씨(釋氏)와 같지 않다. 한 번 보면, 끝내 비어서 고요함으로 가는 것이 편하다고 마친다.(一見了便終空寂去).』 // 《정씨외서》제11.​불교 경전에서 이미 아는 것에서 집착을 버리라고 하고, 성품(본성)을 빔(공空)이라고 한 것은 새로운 정신적 생각을 위한 출발점이다. 즉, 새로운 깨달음을 위하여 기존의 것을 공空(빈 것, emptiness)으로 생각한 것이다.​그런데 정이천은 불교에서 한 번 본 것을 그대로 비어서(공空) 끝나는 것으로 오해하였다. 불교를 평가하려면, 불교 경전을 인용해서 설명하면서 평가해야 한다. 그 과정이 정신세계의 포용력이며, 생각의 폭이 넓어지는 것이고, 생각이 깊어지는 것이다. 유학의 갈래(학파) 중에 하나인 주자학파의 단점은 불교를 마치 학문의 적(敵)처럼 생각했다는 오해에 있다. 다른 학문에 대한 태도에서, 〔폐쇄적인 학문태도〕와 〔적대적인 학문태도〕는 학문이 진보하지 못하는 중요한 원인에 포함된다.​기독교에서 다른 종교에 대한 태도 또한 마찬가지이다. 기독교는 미신을 믿지 않는다. 기독교는 다른 종교 속의 미신은 물론, 자기 기독교 제도 내의 미신과 불합리까지도 지속적으로 개혁을 해 나가야 한다. ㅡ 타락한 중세 교회에서 개신교의 정당성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 21세기에 개신교의 이름을 걸고 타락한 제도가 있다면 이미 개신교가 아니다. 기독교가 다른 종교에 대하여 진리의 내용에 자신감이 있다면, 다른 종교를 연구하여 포용하면서 그들을 이끌어 나가야 한다. 기독교에서 깨달음이 없을 때에, 열광신도들이 가장 배타적인 태도를 가진다.​내가 경험하여보니, 한국의 기독교는 여러 종교 중에서 가장 배타적인 태도가 있다. 그들은 다른 종교는 다 지옥 간다고 위협하는 경우가 많다. 21세기엔 그것 때문에 오히려 기독교가 편협하고 좁은 종교가 되어가고 있다. 물론 무당이나 굿거리, 그리고 점치는 것이 미신이라는 것은 비기독교인들도 이미 다 알고 있다.​불교 제도가 모두 옳다는 것은 아니다. 동양 3국에는 이른바 《돌중》이라고 불리는 무식한 중들이 많이 있다. 기독교 제도에서도 그 많은 목사들이 다 훌륭한 것은 아니며, 범죄를 지은 목사들도 뉴스에 나온다. 대형교회 목사가 횡령했다는 뉴스도 있다. 유학(Confucian Study)에서는 의례와 절차를 따지는 사제들이 없어지고, 이제 전통 철학 중의 하나가 되었다.​21세기 이후의 우리 인간들의 삶은 종교제도가 아니라, 종교 경전으로 돌아가 그 속의 미신까지도 제거해야 한다. 그러므로 철학 고전 속에서 시대에 맞지 않는 부분을 평가하고 오늘날 실천할 것을 새롭게 말해야 한다. 각종 전문 과학기술 속에서도 고칠 것은 많다. 화학기술 중에서도 100여 개의 원소 중에서 자연계에 순간적으로 있다가 사라진 원소들은 거의 실용성이 없다. 그러므로 그런 것을 교과서에서 가르칠 필요는 없고, 그저 그런 실험을 할 수는 있다고 가르치는 것이다. 그러나 어느 압력, 어떤 성분, 어떤 온도, 어떤 충격, 기타 어떤 조건에서 어느 요소가 지속된다고 발견하면, 그것은 학교 교과서에서 가르칠 수 있는 큰 발견이다. 그런 조건들에서도 순간적으로 있다가 사라지면, 실용성이 없다.​​49. 이천 선생이 “바뀜을 전함”(역전易傳)의 서문에서 말하길, : 『역(易, Yuuk)은 “변하여 바뀜”(變易)을 뜻한다. 때에 따라서 변화하는 “6선을 걺”(卦爻괘효)의 형상을 관찰해서 사람은 길(道)에 따르는 것이다. 《주역》(Zhou's Chainging 周易)은 광대한 이치를 다 갖추었으니, “본성과 목숨, 성품과 명령”(性命)의 이치에 따르게 하며, “모양 있음”(有形)과 “모양 없음”(無形)의 이치를 인식하고, 사물의 “실제 상태”(實狀)을 온통 알게 하며, 사람이 알지 못하는 것을 개발해서 사람이 하는 사업을 완성하게 한다. ... 바뀜(易)에 성인의 길(道)이 넷 있다. 말에서 그 언사를 숭상하고, 행동에서 그 변화를 존중하고, 그릇을 만듦에서 형상을 귀중하게 여기며, “점을 헤아림”(guess for auspicating 卜筮복서)에서 그 점(fortune-telling)을 숭상한다.』 // 《이천 문집》부록 제1. 《정이천의 바뀜을 전함》(伊川易傳)​형상(form)은 물질matter에만 있다. “여섯 선을 걸어서”(卦爻괘효) 그 형상을 관찰하는 것은 우주 물질matter을 관찰하는 것이다. 그런데 물질matter에서도 “모양이 있는 것”(有形)과 “모양이 없는 것”(無形)이 있다. 모양이 없는 것은 공기 같은 기체나 물 같은 액체 또는 자석·전기에너지와 열에너지 전파와 빛 에너지 등이 있다. 그런데 빛은 모양이 있는 발광체에서 나오거나 반사체에 부닥쳐서 우리 눈으로 들어오므로 발광체 전체의 모양이나 반사체의 모양을 알 수 있다. 이때에도 빛 자체의 모양이 있어도 인간이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빛은 〈입자의 최소단위〉이고, 그것이 〈인간 인식의 한계〉이기 때문이다.​그런데 그 물질의 변화로부터 개개의 인간의 길흉을 점치는 것은 주권자=君子(Gun-za)가 할 바가 아니다. 복서(guess for auspicating 卜筮)에서 그 점(fortune-telling)을 숭상하는 것은 21세기의 성인(saint human)의 길에 포함될 수가 없다. 역(Changing 易)은 물질의 추이를 알 뿐이다. 정이천이 말한 성인(saint human)의 네 길에서, 앞의 셋은 맞으나, 넷째 것은 크게 비판받아 마땅하다. 이 구절에서 정이천이 점치는 것을 성인(saint human)의 길이라고 오해한 후에, 인간의 정신spirit 가치에서 의미가 낮은 물리ㅡ생리ㅡ심리의 변화를 다루고 있다.​55. 『바뀜(易)을 보는 데에서 “때의 마땅함”(時宜)을 알아야 한다. 무릇 “6선”(六爻육효)은 어떤 사람에게도 응용될 수 있다.』 // 《정씨가 남긴 책》제19 「이천 선생의 말씀」5.​물질의 변화는 때가 있다. 그 때는 시간을 뜻하고, 시간은 생명이 느끼는 흐름인식이다. 변화는 운동이고, 물질 운동을 느끼는 것은 생명의 감각이다. A 지점에서 B 지점으로, A 상태의 성질에서 B 상태의 성질로 변화한 것을 안다는 것은 생명이 그 변화를 감각했다는 것이다. 변화의 운동을 생명이 느끼면, 그 만큼 시간이 흘렀다는 것을 뜻한다. 다시 말하건대, 시간의 개념은 생명이 느끼는 흐름인식이다. 인간이 물질 운동의 규칙을 안다면, 그 다음 물질의 변화를 예측할 수는 있다. ㅡ 이것은 개개 인간의 길흉을 점치는 것이 아니다.​56. 『역(Changing 易) 속에서는 오직 반복·왕래·상하를 말하고 있을 뿐이다.』 // 《정씨가 남긴 책》제14 「명도 선생의 말씀」4.​59. 유정부(游定夫)가 이천에게 “음양의 변화를 헤아릴 수 없는 것을 신(神)이라 한다”에 대해서 물었더니, 이천이 대답하길, “그대는 의심이 나서 묻는 것인가? 어려운 것을 가려서 묻는 것인가?”​음양은 물질세계와 생명의 육체에 있다. 또한 남녀의 심리라는 것도 있다. 즉, 〔물리-생리-심리〕에 있다. 정신spirit 단계에서는 음양이 없다. 정신spirit이나 신은 물질이 아니기 때문이다.​61. 이천 선생이 《춘추전》(春秋傳 Spring-Autumn Biography) 서문에서 말하길, : 『하늘이 백성을 낳되 반드시 뛰어난 인재를 있게 하니, 이가 곧 주권자(군주)이다. 백성을 다스려 쟁탈을 없애고, 백성을 잘 인도하여 생계를 이루게 하고, 백성을 잘 교화시켜 윤리를 밝게 한다. ... 후세에 와서 《춘추》(春秋 Spring-Autumn)를 역사서로만 보아, 선악을 “기리거나 떨어뜨림”(褒貶포폄)했다고만 말할 뿐, “세상을 경영함”(經世)의 “큰 법”(大法)이 됨은 알지 못한다.』​《춘추》(Spring-Autumn 春秋)는 역사서다. 그 역사 속의 전달함(delivery 傳)에는 자서전과 인물전(영웅전)이 있다. 그 중에 자서전이 가장 믿을 만하다. 그러나 남이 써준 자서전, 즉 대필(代筆) 자서전은 가짜이다.​​64. 『만약 하(夏)의 우(禹)가 홍수를 다스리기 위해서 밖에 나가서 수고한 나머지 손발이 굳어진 것과 〔안회顔回가 학문을 즐겨서〕 문을 닫고 밖에 나오지 않았던 것과의 둘의 중간을 취하면, 그것은 가운데(中)가 아니다. 만약 손발이 굳게 함에 당해서는 이것이 가운데(中)이고, 문을 닫고 밖에 나오지 않음에서는 이것이 가운데(中)이다. “권리기준”(權)은 저울추라는 뜻이다. 무엇을 “권리기준”(權)으로 삼을 것인가? 그것은 옳음(義)이고 때(時)이다.』 // 《정씨가 남긴 책》제15 「이천 선생의 말씀」1.​역사나 삶은 긴급함과 생각함의 순서가 있다. 긴급한 때의 의(義)는 몸을 움직여 구원하는 것이고, 생각할 때의 의(義)는 깊은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다. 정이천이 말한 것은 육체의 일이건 정신의 일이건, 꼭 필요할 때 인간의 본성에 따라 그것을 하는 것이 가운데(中)이며, 육체와 정신의 중간은 가운데(中)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인간 공동체 국가에서의 “권리기준”을 말했다. 그것이 “공유주체”(common own subject)에서 “공유주관”(common own view of subject)이다. ​65. 『《춘추》(春秋 Spring-Autumn)를 읽음은 전달함(傳)에 의해서 “일의 발자취”(事跡)을 생각하고, 경전(經)에 의해서 전함(傳)의 “이것과 아닌 것, 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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