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대지 중국구매대행 물류 중국포워딩 무역대행 알아본다면?(중한무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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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Uba 작성일24-12-09 20:49 조회1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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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중한물류 예시자의 신청자는 파산선고/면책 신청을 한 개인파산 신청자입니다. 수입은 월 300만원(연금포함) 정도, 노모 1명, 장애를 가진 동생 1명, 이전 영업장 정리하면서 생각 편파변제금 대략 3000만원 중 환가대상이 되는 2500만원 나와야 하는데 환가 전혀 안 나온 수원회생법원 신청자의 채무증대 및 지불불능 경위서를 아래 하단에 소개해 봅니다.자영업 음식점을 폐업한 후 남은 권리금 4,000만 원으로 일부 상거래 채권을 결제하고 급여 미지급분과 개인 채권자 빚을 갚았습니다. 이후 배달업무와 연금으로 월 300만 원 이상의 수입을 올리고 있지만, 국세, 지방세, 4대보험 체납 문제로 개인회생이 아닌 파산을 선택했습니다. 경위서를 A4 20장 분량으로 꼼꼼히 작성하여 가정의 어려움을 상세히 설명했습니다. 노모와 장애가 있는 동생과 함께 거주하고 있으며, 권리금 정리 과정에서 특정 채권자에게 편파적으로 변제한 부분이 있었음에도 관재인이 환가하지 않고 종결 처리했습니다. 신청서 제출부터 파산면책결정까지 3개월 2일이 걸렸습니다.환가를 당해야 하는데 채무증대 및 지불불능 경위서 잘 작성해서 환가 안 당하고 파산면책결정이 된 사건의 경위서를 참고해 보실만한 합니다. 경위서 작성시 정성을 다해 작성해 주셔야 합니다. 그래야 법원, 관재인, 판사도 긍정적으로 검토후 조금 문제가 있는 부분도 이런 저런 사연을 참고해서 결정하시게 됩니다. 경위서의 중요성을 알 수 있는 사건이었습니다.채무증위 및 지불불능 경위서 예시먼저 본 경위서를 작성하기에 앞서 저의 어렵고 힘든 시기에 물심양면으로 많은 도움을 주신 여러 지인들 그리고 채권기관 및 관계자분들게 심심한 사과의 말씀을 전합니다.1. 출생 그리고 학창시절 19OO년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나 그 당시 누구나 그렇듯이 가난한 유소년 청년시절을 보냈습니다.초등학교 시절 저희 가족은 제가 출생 전 할아버지께서는 이미 돌아가셨고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남동생 여동생으로 구성되었으며, 할머니께서는 이 당시부터 집안 내력인 중풍으로 고생하고 계셨고 이로 인해 저희 가정형편은 여의치 않았으며 아버지 혼자 외벌이로서는 할머니 간병과 기본 생화을 영위하기가 불가하였습니다. 견디다 못한 아버지께서는 19OO2년 가을 수백년을 살아온 고향 OO의 작은 집을 처분하고 경기도 OO로 이사를 하였습니다.아버지께서는 이주 후 OO공장 직원 경비원 등 가족부양을 위해 열심히 일을 하셨습니다. 남들과 다름없는 초등학교 생활을 하던 중 저는 아버지의 의지로 6학년 1학기를 마치고 서울로 전학을 하게 되었습니다. 한편 아버지께서는 벌이가 시원치 않아서인지 어느 날 갑자기 집을 처분하고 택시를 구입하고 택시업을 시작하였고 이전보다는 확실히 살림살이가 편해졌습니다. 그렇게 다소 편해진 초중고 생활을 보내던 중, 고2 2학기 무렵 차량 반파 수준의 커다란 교통사고가 중한물류 나게 되면서 서울 OOO동 OO집에서 OO고등학교를 다니던 저의 학업지원에 어려움이 생겨 저는 이때부터 OO에서 OO까지 등하교를 하게 되었습니다.학업에 상당한 지장이 생긴 저는 고민 끝에 다시 OO로 눈물을 머금고 전학을 오게 되었고 다소 늦은 사춘기의 방황도 겪었습니다. 급기야 적응을 제대로 못한 저는 당시 시골에서 흔히 있었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역할중인 반장한테 맞아 턱이 깨지는 중상을 입고 19OO년 8~9월까지 1달여간 병원 신세를 지게 되기도 하였습니다. 개인적으로 참으로 안타까운 시기였습니다.2. 재수 대입 군입대당연한 결과를 대학입시에 실패한 저는 어려운 형편임에도 장남은 무슨 일이 있어도 장남은 잘 되어야한다는 부모님 덕분에 와신상담의 마음가짐으로 재수를 하였으나 지금도 그렇지만 능력과 노력이 부족한 듯합니다. 재수 실패 후 후기 대학인 OO대학교 OO학과에 입학하였으나, 학과가 적성에 맞지 않았고 80년대 혼란한 시대상 등으로 공부에 전념하지 못하고 방황에 방황을 거듭하였습니다.그렇게 방황하며 무의미한 대학 생활을 보내던 중, 문득 장남으로서 또 개인으로서 미래에 대한 걱정이 몰려왔습니다. 심사숙고 후 내린 결론은 제대로 하지 못한 공부를 한번 해보자는 것이었습니다. 평소 사람과 어울리고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했던 저는 OOOO학이 적성에 맞다고 생각해 OO대학원 OOOO학과에 입학을 하였으나, 학부가 전혀 다르고 제대로 된 공부를 하지 못하고 입학을 위해 속성으로 한 공부로는 동기들과 경쟁에서 쳐지게 되었고 동 분야에서 성공이 어렵다고 판단한 저는 3학기를 마치고 19OO년 3월 OOOO장교로 입대하였고 19OO년 7월 만기 전역하였습니다.3. 전역, 입사 그리고 결혼전역 후 어느덧 우리 나이로 30살이 되어버린 저는 나이 제한 등으로 취업에 제한 있던 당시 그나마 제한에 비교적 여유로웠던 OO일보, OO일보 등 지방OO사 시험은 합격하였으나 지방대 출신 및 학점 부족 등으로 매번 안타까운 결과를 안게 되었습니다. 그 와중에 19OO년 서울OOO(당시 OOO공사)가 나이 제한 및 학점 등에 지원 자격에 제한이 적어 지원, 합격의 결과를 얻게 되었습니다. 오랜만에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한편, 제가 서울OOO 입사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평소 술을 매우 좋아하시고 가족 내력이 있었음에도 건강관리에 소홀하시던 아버지께서 결국 상당히 중한 중풍에 걸리게 되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중간중간 잠시 회복하시는 듯 하였지만 돌아가시기 1년 동안은 와병하셨고 결국 19OO년 OO월 OO일 운명을 달리하셨습니다. 아버님은 평소 손주 보기를 학수고대하였는데 저의 19OO년 OO월 늦은 결혼, 아내의 늦은 출산으로 그나마 19OO년 OO월생인 장남을 돌아가시기 전 잠시라도 볼 수 있었음을 다행이라 위안해 봅니다. 4. 퇴사와 중한물류 이혼장기간에 걸친 아버지의 와병으로 인한 경제적 어려움, 늦은 입사와 OO대 출신이라는 불이익, 그리고 군대보다 못한 불합리한 인사관리로 인한 상사와의 갈등, 등으로 직장생활이 순탄치 못한 저는 행정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OO년여의 직장생활 중 반 이상을 현장부서에 보내면서 개인사업을 또는 장사를 꿈꾸어 왔습니다. 그러던 중, 회사 근무 중 알게 된 지인으로부터 OOOO 내 상가를 조성, 임대사업을 같이 하자는 제안을 받았고 저는 20OO년 O월 퇴사를 결정하고 금모씨 이모씨 그리고 당시 OO자동차 OO공장에 다니던 손위 동서가 회사 구조조정으로 어려움에 처해 있어 처형에게 사업내용을 설명하고 사업을 시작하였습니다.사업은 비교적 순항하였고 수익은 괜찮았습니다. 저는 상권분석 및 행정업무를 담당하였고 동업자들은 상가 운영 및 임대업무를 담당하였습니다. 몇 년만 고생하면 우리 집도 잘 살 수 있다는 희망으로 들뜬 시기였습니다.그러나 좋은 일은 오래가지 않는 듯합니다. 동업자의 상가운영상 불법전대(전대행위 금지위반 등)으로 매장계약 강제해지를 당해 강제퇴거 및 원상복구 명령을 받아 1년이 넘는 기간 명도소송을 통해 최종 패소하게 되었습니다.패소 후 책임 관계를 놓고 큰 다툼을 하였고 더 이상의 관계가 무의미함을 깨닫고 감당하기 어려운 손해를 입고 결별을 하게 되었습니다. 1년이 넘는 기간의 지리한 소송 중에 자신만의 피해를 우려한 처형의 지속적이고 반협박의 원금 회수 요구와 이에 동조하여 빨리 돌려주라는 아내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 아마도 자기와 동의 없이 사업을 벌여 이 지경에 이르게 됐다는 생각인 듯 했습니다.어쨌든 한 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진 저는 인내심을 잃고 잦은 부부싸움을 하게 되었고 마침내 약 OO여 년간의 부부관계에 종지부를 찍었습니다. 아내는 자신은 직장생활 중으로 아이들을 키울 수 없다고 했고 아마도 어머니가 있으니 제가 아이들 키우는 게 낫다고 생각한 듯한데, 저는 처음부터 독종 여인들로 가득한 처가 쪽으로 보내기 싫어 제가 키우기로 했습니다.사업실패로 모든 것을 잃은 저는 이혼하면서 받은 전세금 O억O천만원 중 O천만원으로 대출금 카드대금 등을 갚을 길이 없었고 결국 20OO년 수원지방법원에 개인회생을 신청하였고 제대로 상환하지 못하여 한때 회생폐지되는 등 정말 정말 천신만고 끝에 20OO년 OO월 채무졸업을 하고 면책결정을 받게 되었습니다. 5. 禍不單行 - 어머니의 낙상 그리고 남동생의 화마사업실패로 나락으로 떨어진 저의 소식을 들은 지인(친구 선후배 등) 들의 도움으로 20OO년 여름 OO시 OO동에서 `OOO`라는 작은 선술집을 하게 되었는데 창업비용 약O천만원 중 반 약 70%는 주류대출, 지인의 십시일반 도움이었습니다. 너무 감사하고 감사한데 10년이 지난 지금도 갚지 못하고 중한물류 있습니다. 너무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11평의 작은 가게였으나 가게는 비교적 장사가 잘 되어서 월 OOO만원 정도의 수익이 발생하였으나, 개인회생 OOO만원 집월세 기본생활비, 애 둘(초딩1 중딩1) 교육비를 감당하기는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 미혼으로 원룸에서 혼자 살던 동생이 거실에서 동년 거실용 부탄가스를 사용하던 중 터지는 사고가 발생하여 원룸은 거의 전소되고 동생은 전신 70% (3도 30%, 4도 40%)의 화상을 입고 중태에 빠졌습니다. 당시 생존 확률 10% 미만이라는 의사의 충격적인 소견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동생의 안위보다는 당장 병원비와 원룸 주인의 손해 발생 비용을 저한테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해달라는 요청이 더 걱정되었습니다. 참으로 스스로가 한심하고 또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전 지금도 “ 우리 아들 불쌍해서 어떻게 해” 하는 어머니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화부단행!재앙은 홑으로 오지 않는다 하죠. 평소 친구보다 한 10년은 젊다는 소리를 듣던 어머니가 동생의 화마로 정신이 없는 지 20OO년 초봄 계단에서 넘어져 고관절이 부셔져서 고관절 수술을 하였습니다. 노인은 노인인가 봅니다. 그 이후로 제대로 거동을 하지 못하고 움직임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지금은 월~금요일까지 요양보호사의 도움이 없이는 정상적 활동이 불가한 상황에 있습니다. OOO 영업으로 발생하는 수익으로는 기본생활비 병원비와 원룸 주인의 손해발생비용 등을 위해 지인으로부터 빌린 돈의 상환은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첫 장사 시작 전 교육을 받았던 `OOO`프랜차이즈 회사의 전무 OOO씨에게 연락을 취해 OOO을 하고 싶다고 부탁했습니다.OO시 OO동에 비어있던 가게에서 주변에서 맨땅에 헤딩이라고 무모한 짓이라고 했지만 나름 상가자리 보는 눈이 있다고 자부한 저는 주변의 만류를 무릅쓰고 투다리 권리금 OOOO만원, 보증금 OOOO만원과 주류대출 O억 친구 OOO OOOO만원 등으로 시작했습니다.20OO년 OO월 개업 직후 근처에 주점이 없던 OO동 OOO은 본사에서도 큰 관심을 가질 정도로 아주 장사가 잘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름장사인 OO집은 11월이 되면서 매출은 40% 정도 줄게 되면서 주류대출 OOO만원 기타 차용금원금 이자 개인회생 변제금 등 도저히 갚을 길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장사가 잘 되던 20OO년 OO월까지는 대출금 상환 차용금 회생금 등 지연하면서 근근히 버텼으나 더 이상 감당이 어려운 상황에서 때 마침 같은 건물 1층에 있던 가구창고 자리가 비어 급히 OOO을 매각하고 그간 독촉받았던 주류 대출금, 각종 원금 이자, 미납 회생변제금 등 일부 변제하고 남은 돈 약 OOOO만원으로 지인 후배를 주방장으로 영입하고 새로이 밥 장사를 하기로 했습니다.그런데 중한물류 현실은 생각과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O억여원이면 가능할 것으로 생각했던 창업비용은 훨씬 더 커졌습니다. 그래서 후배 인테리어 업자가 보증인이 있으면 대출 알선을 해 주겠다 해 회사 친구 OOO과 여동생에게 보증 부탁하였는데 친구는 신용부족으로, 여동생은 보증은 절대 안된다는 냉정한 거절이 돌아왔고, 자금 마련이 불가해진 관계로 결국 공사 시행 중 약 OO일간 공사가 중단되는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돈을 구하지 못해 매일 발을 동동 굴렸으나 별다른 방도가 없었고 결국 ‘독’이라걸 알면서도 또 사채 OOOO만원 후배지인 OOO 2500만원을 빌려 억지로 가게 문을 열게 되었습니다.밥집(OOO)은 예상보다는 조금 못 하였지만 그럭저럭 유지는 되었으나 또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바로 지인 후배 주방장의 대단한 `乙질`이었습니다. 자신이 만든 레시피 조미료를 매월 OOO만원 정도 받아 가던 그에게 저는 생각만큼 장사가 안 덜 되어 힘드니 조미료 비용을 줄이자 했더니 그는 그 자리에서 그러면 그만두겠다고 선언을 하는 을질을 하였습니다. 제 형편을 잘 아는 녀석이 한 달 정도 을질을 견디며 주방장이 크게 필요하지 않고 제가 단시간에 배울 수 있는 업종을 찾아서 비교적 최소비용이 가능할 듯한 ‘OOOOO’을 지인 소개로 하기로 했습니다.어쨌든 업종 변경에는 비용이 발생하였는데 당시 만나던 친구(OOO) 으로부터 OOOO만원 빌려 해결하였습니다. 주방장과 주방아주머니의 휘둘림에 진절머리가 난 저는 OO, OO 기술을 배워 을질에서 자유로워졌습니다. 이제 장사만 열심히 잘 하면 되었습니다. 매번 그랬듯이 초기엔 비교적 순항하였으나 자금부족, 경험부족 등의 이유로 난관을 이겨내지 못 했는데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액면 매출은 괜찮았는데 이제는 식자재가 문제였습니다. 초기 6개월은 원가율 35~40%였던 원가율이 45~50%로 상승한 것입니다. 공급업체에 항의성 문의를 하였는데 구제역이 돌아서 어쩔 수 없다는 답변만 돌아왔습니다. 도저히 수익을 낼 수 없는 구조입니다. 약 2년 정도 줄이고 또 줄여서 장사를 이어 나갔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말입니다. 이는 단지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자영업자에게는 거의 사형선고에 다름없는 ‘코로나19’ 시작이었습니다. 코로나로 인해 홀 매출은 거의 반 토막이 났고 상대적으로 배달 매출은 늘었으나 아시다시피 배달 매출 이익은 10% 내외입니다. 그런데 이 와중에 정부에서는 2019, 2020년도 매출이 각 1년 전보다 매출이 10% 이상 줄었을 경우 보상금을 주는 데 당연히 해당된다고 생각하고 급한 불이나 끄자 하고 있었는데 저희 업체는 해당 사항이 없다고 합니다. 깜짝 놀란 저는 담당 세무사에 문의했더니 1년 반 넘는 기간 동안 배달의민족 쿠팡 요기요 등 배달 매출 부가세 중한물류 신고를 하지 않았다 합니다. 이전에 밥집을 하는 동안 배달을 하지 않아 누락을 했다합니다. 화가 났습니다. 정말이지 장사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싶었습니다. 자세히 살피지 못한 저의 불찰도 있었지만 하늘이 노래지는 마음이었으며 설상가상으로 약 OOOO 여만원의 부가세, 종부세가 나왔습니다. 지금도 감당하지 못하고 수시로 독촉받고 있습니다.6. 마지막 장사코로나19가 기승을 부리면서 장사가 점점 어려워지게 됨에 따라 장사 지속에 대한 깊은 회의와 고민을 하게 되었습니다. O년여에 걸친 수 많은 지인의 도움과 응원에도 불구하고 삶의 질이 악화됨은 물론 점점 깊은 수렁에 빠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던 중 평소 장사를 하면서 알게 된 지인인 OOO님께서 당신 지인 중 OO체인점 대표가 있는 데 최소의 비용으로 업종전환을 권유하였고 저는 체인점 대표와 OOO대표의 도움으로 OOOO만원 이내의 비용으로 업종전환을 하였습니다. 정말 오랜만에 일이 순조롭게 풀리는 듯 했습니다. 소곱창 업종이 살짝 하향곡선을 그리는 상황이었지만 다행히 OO시 OO동에는 없는 관계로 장사는 소위 ‘오픈 빨’을 감안하더라도 잘 되었습니다. 그러나 진정 인생은 화무십일홍인가 봅니다. 그렇게 나름 성황을 이루고 있던 한 달여의 시간이 지난 시점, 20OO년 OO월경 정부는 코로나19의 창궐을 이유로 강력한 ‘영업시간 및 인원 제한 조치’를 시행했습니다.처음에는 24시 4인으로 시작 영업 제한은 21시 2인이라는 밤 장사를 하는 자영업자에게는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조치를 취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감당불가한 어마어마한 사건이었습니다. 저희 가게는 저와 직원 3인 인원으로 일 매출 OOO만원의 매출로 억지 운영을 하고 있었으나, 진정 치명적인 코로 나로 인해 매출이 거의 반토막으로 떨어져 부득이 직원 1인을 사정사정해 소정의 위로금을 주고 조기 퇴직을 시키게 되었습니다. 사실상 부당노동행위에 해당됨은 물론 또한 도의적으로도 대단히 미안했지만 개인적으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경영정상화는 쉬운 말로 ‘택’ 도 없었습니다. 저는 가게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해서 퇴근 시간 이후 2~3시간 정도 부업 으로 ‘쿠팡배달’을 시작했고 이는 현재 저의 주업이 되고 있습니다.더 이상 가게를 유지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판단한 저는 가게를 처분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장사에 진절머리가 난 저는 이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을 하던 차에 친하게 지내던 후배 OOO이 시내에 작은 가게가 나왔다는데 ‘형은 돈도 기술도 없고 나이도 60이나 된 사람이 뭘 할 수 있어, 내가 주방일 하면서 가르쳐 줄테니 배워서 나중에 혼자서 운영해 봐’ 하면서 마지막으로 한번 해 보자고 하였습니다. 몇일을 고민하던 저는 시내 가게에 가계약금 OO만원을 중한물류 걸고 약 OO여일의 남은 가계약기간까지 현 가게가 팔리면 마지막으로 함 해보기로 마음을 먹었는데 급매로 내놔서인지 불행인지 다행인지는 모르지만 기한 내 가게가 팔렸습니다. 20OO년 OO월 후배와 저는 의기투합하여 둘이 거의 몸으로 때우며 주방 청소, 페인트칠 등 웬만한 내부 인테리어는 직접하면서 최소의 인력과 비용으로 다시 출발하게 되었습니다. 매장이 작은 관계로 매출은 그리 높지 않았음에도 순수익은 오히려 더 많았고 이대로만 간다면 어떻게 재기의 기회가 다시 올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가지기도 하였습니다. 그렇게 무탈하게 OO개월을 특별한 걱정없이 영업을 하던 중 청천벽력과 같은 얘기가 들려왔습니다. 가게에서 불과 40~80m 내외의 거리에 40~50평대의 프랜차이즈 ‘OOO’과 ‘OOOOO’ 이라 고기전문점이 거의 동시에 오픈하게 된 것입니다. 17평 테이블 8개의 소규모 가게가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20OO.OO월부터 30% 이상 떨어진 매출은 회복이 불가하였습니다. 대부분의 자금을 빚으로 충당한 저는 당연히 월세, 대출금 이자, 4대보험, 식재료비 등 안 밀린 것이 없었습니다. 매일 매일의 독촉 전화, 문자는 저를 막장으로 모는 듯 했습니다. 정말이지 만사가 귀찮았습니다.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도피하고 싶었습니다. 도저히 견딜 수 없던 저는 결국 20OO년 OO월 가게를 처분했습니다. 가게 처분 후 일주일여를 무위도식하며 지내던 중 저를 잘 아는 친한 후배 (OOO)와 소주 한잔 했습니다. 후배는 ‘형 그냥 먼 지방으로 도망가 당분간 모든 것 잊어버려, 형은 죽으면 아마 부처님보다 사리가 더 많이 나올거야’ 라는 말로 조언과 위로를 하였습니다. 저도 그런 생각이 없지는 않았지만, 말년을 편하게 해드려야 하는데 갈 수록 말년이 더 불행한 연로한 어머니, 어릴 적 OOOO증상이 있으나 이혼으로 인한 경제적 어려움으로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해 사회적응을 잘 못하는 착하디 착한 장남. 야무지고 잘 생긴 막내아들, 화상을 입고 죽다 살아나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는 동생 이 들을 생각하면 그렇게는 할 수가 없었습니다. 어떻게든 이들을 책임져야 하는 데 점점 자신을 잃어 갑니다. 그래도 뭔가는 해야하는데 하는 마음으로 일단 아무것도 없는 저는 몸으로 때우는 일을 생각했습니다. 쿠팡 배송일을 떠올려 봤습니다. 열심히 하면 OOO만원을 벌 수 있다고 해서요. 새벽 일이 단가가 좋다고 해서 24~06시 OOOO지역의 물류배송일을 하였는데 정말이지 쉬운 일은 없는가 봅니다. 약 보름간 1일 O만여원의 수입을 얻은 반면, 물건을 들고 잘 모르는 지역의 빌라 등 3~4층을 오르내리는 일을 반복, 또 제 시간 내 배송을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는 중한물류 일은 OO세가 된 저에게는 무리였던 것 같습니다. 결국 무릎이 퉁퉁 부어 무릎에서 물을 약OOOml 가량 빼내는 등의 치료비가 만만찮았습니다. 물류배송 일이 저에게 무리가 있다고 판단한 저는 가게 일을 하면서 부업으로 했던 쿠팡 배달일 다시 하게 되었는데 그나마 이 일이 좀 더 낫다고 판단하였고 이 일이 이제 주업이 되었고 지금도 계속하고 있습니다.7. 회복불능, 희망 없는 미래 그리고 파산신청저는 어머니, 두 아들, 남동생의 생계를 어떻게든 책임져야 했습니다. 쿠팡물류 배송, OOOOOO제조, OOOO보험영업, 한국OOOO 회사에서의 텔레마켓팅 등 폐업 후 거의 단 하루도 쉬지 못하고 일을 해야만 했고 또 그렇게 했습니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 미래가 없는 너무나도 명확히 이 일을 언제까지 해서 부채를 상환하고 정상적인 생활을 하나 하는 생각을 하다 보면 깊고 깊은 회의가 몰려옵니다. 사업실패 그리고 이혼, 어려운 일을 겪고 장사를 시작하면서 사람 만나고 대화를 하는 것을 좋아해서 ‘ 잘 할 수 있고 잘 될 수 있고 재기할 수 있어’ 라는 초기의 ‘자신감’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이제는 잊었습니다. 많은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번듯한 재기도 바라지 않습니다. 다만. 연로한 어머니의 얼마 남지 않은 여생을 아주 조금이라도 편안하게 보내 드리고, 또 이혼 후 제대로 학원 한번 보내지 못하고 거의 방치하다시피 키웠지만 사고 한 번없이 착하게 자라준 두 아들이 자립할 수 있는 시기까지 최소한의 도움을 줄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뿐입니다.존경하는 재판장님!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현 시점 현 상황에 이르게 된 모든 일의 원인과 책임은 저에게 있음을. 또한 저를 도와주고 응원해 준 지인들 그리고 채권자 관계자 여러분에게 돌아가는 피해 역시 저의 탓 임을. 저 개인으로는 야단맞고 잘못에 대한 처벌을 받아 마땅합니다. 다만, 사랑하는 저희 가족의 어려운 형편을 불쌍히 여겨 조금의 기회라도 주시길 간곡히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2024.OO.OO. OOO 위 예시자처럼 A4용지 20장은 아니더라도 정성껏 채무발생의 원인에 대해 그리고 얼마나 노력을 했는지 어필하시면 경위서 읽어보시고 사건심리하시는 데 법원, 재판부, 관재인도 좋은 인식을 심어주기에 파산면책결정이 보다 쉽게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지성이면감천이라는 말이 있듯이 법원 관계자의 마음을 움직이면 이런 기적도 일어납니다. 힘들더라도 서류 꼼꼼히 경위서 꼼꼼히 상세히 작성해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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